대체적 분쟁 해결의 수단인 중재는 필자가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고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이래 큰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분야인데, 이를 토대로 필자는 지금까지 다양한 사건에서 중재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고 있고, 헌법적 이슈가 있는 신청금액 규모가 꽤 큰 국제중재사건에서 전문가증인으로 채택되어 전문가 보고서를 제출하고 중재심판법정에 출석하여 전문가 증언을 한 경험도 있다.
그런데 대체적 분쟁 해결 절차 가운데 전문가 결정(Expert Determination) 또는 중재감정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는 당사자들이 법률관계가 아닌 일정한 사실관계의 쟁점, 예컨대, M&A에서 주식 등 자산의 가치 평가나 건설공사에서 기성고나 물량의 확정 등을 제3의 전문가(중재감정인)에게 일임하고 그 결정에 따르기로 하는 제도이다. 서구권 국가에서는 이러한 중재감정 제도가 중재와 더불어 널리 활용되어 분쟁의 신속한 해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충분히 활용되지 못해 아쉬움이 있다.
전문가 결정 제도에서 전문가는 비록 당사자에 의하여 선임되는 경우에도 당사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의견을 제시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전문가 결정 절차를 별도로 두고 있는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의 경우, 전문가 결정에 대한 규칙(WIPO Expert Determination Rules) 제10조 a항에서 명문으로 전문가가 공평(impartial)하며 독립적(independent)일 것을 요구하는 한편 제14조 c항에서 전문가가 타방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일방 당사자와 분쟁의 대상에 대하여 협의하는 소위 ex-parte 교신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전문가 결정 절차가 간혹 실무에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에 신문지상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진 교보생명의 풋옵션 관련 분쟁도 전문가 결정 절차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동 사건에서 교보생명의 대주주인 신창재 회장과 투자자들은 주주간계약을 통해 교보생명의 주식의 공정시장가치(Fair Market Value, FMV)를 신창재 회장과 투자자들이 각각 선정한 독립적인 감정평가기관의 평가액의 평균값으로 하기로 합의하였는데, 법률적으로 볼 때 이러한 합의는 전문가 결정 절차에 대한 합의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는 비록 당사자에 의해 선임되는 경우에도 당사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신속하고도 효율적인 대체적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전문가 결정 절차가 활발히 활용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관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엄중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동 사건에서 투자자들에 의해 전문가로 선정된 회계사들이 공인회계사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형사재판이 진행중이다. 언론 등 매체를 통해 알려진 공소사실에 의하면 회계사들이 자신을 선정한 투자자들과 200여 건 이상의 문건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투자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평가 방법을 논의한 후 여러 평가 방법 가운데 투자자들이 확인해준 평가방법에 따라 평가보고서를 작성하거나, 투자자가 전달해준 평가보고서 초안 내용 그대로 평가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는 것이고 그러한 회계사들의 행위는 모두 공인회계사법상 허위보고에 해당한다는 것이 공소장의 요지이다. 이러한 회계사들에 대한 검찰의 기소는 그렇지 않아도 대형 회계법인이 감사를 하는 회사에 관한 분식회계로 형사처벌을 받는 등 뒤숭숭한 회계사 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의뢰인으로부터 경제적 대가를 받고 업무를 수행하는 회계사이기에 회계감사 등과 같은 업무에서도 의뢰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고, 알게 모르게 전문가가 의뢰인 입맛에 맞는 업무 결과를 내놓으려는 경향이 생기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주식공모(IPO)와 관련하여 회계법인들이 공모주가를 최대한 높이 산정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되고 있고, 회계법인이 피감사회사에 대한 비감사업무를 수행하는 경우, 회계법인이 비감사업무로부터 얻는 경제적이익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외국의 경우 전문가의 독립성 침해 또는 부정행위에 대하여는 가혹할 정도로 제재를 가하여 경종을 울린다. 미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엔론 사건도 모두 ‘공인회계사의 부실한 감사’를 통해 빚어진 참사였는데, 엔론의 재무제표가 회계기준을 위반하였고 허위로 작성된 것이었음에도 매년 가장 우호적인 적정의견을 주는 등 회계감사기관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했던 회계법인 아서 앤더슨에 대하여 미국 사법 시스템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는데, 결국 엔론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제프리 스킬링 CEO는 징역 24년 4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엔론의 분식회계를 눈감아 준 아서 앤더슨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앞서 언급한 교보생명의 풋옵션 분쟁과 관련한 검찰의 기소는 공인회계사법상 요구되는 회계사의 독립성과 관련이 있지만, 사실 이러한 독립성은 회계사가 아니더라도 전문가 결정 절차에서 어떤 전문가에게도 공히 요구되는 핵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투자자와 신창재 회장 간의 주주간 계약에서 정한 것과 같이 당사자들이 각각 전문가를 선임하는 경우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일방 당사자에 의해 선임된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양 당사자 모두에 대하여 독립, 공평한 입장에서 공정, 적절하게 활동 및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전문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회계사들이 M&A에 앞서 가격 흥정을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고객의 요청에 따라 최대한 유리한 주식 가치 평가를 해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평가보고서를 작성에 임하였다면 이는 전문가 결정 절차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진 외국에서는 이러한 중립적 주식의 가치 평가를 담당하는 전문가가 일방 당사자에게 가장 유리한 평가 방법이 무엇인지를 의뢰인과 논의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전문가 결정 절차에서 전문가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고 또 이를 엄격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앞으로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신속하고도 효율적인 대체적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전문가 결정 절차가 활발히 활용되기 위하여는 전문가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관하여 관련 당사자뿐만 아니라 전문가 집단 전반의 엄중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글은 이동흡 변호사가 2022년 11월 법률신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해당 내용은 링크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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